163 가자레알손흥민2.5(금)조회 231추천 0비추천 0
{천 도 작 법}薦 度 作 法
천도란 불보살님께 재를 올리고, 독경시식 등을 베풀어 망령으로 하여금 정토에 왕생케 하는 의식이다. 이 천도의식은 불보살님을 청해 모시는 시련과 영가를 대하고 모시는 대령, 영가에게 묵은 때를 벗게 하는 관욕과 시식으로 이루어진다.
지금부터 천도작법의식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1. 시련
시련(侍輦)이란 영산재를 지내거나 49재 등 천도재를 성대하게 진행할 때 거행한다. 칠보로 장엄된 연(輦)을 가지고 절 입구에 가서 불보살님과 여러 성현들을 청해 모시는 의식이다.
시련의식은 대부분 범패를 전공한 스님들에 의해서 범음으로 모시는 것이므로 일반적인 재의식에서는 생략하고 대령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다만 범음을 익히지 못한 경우라도 굳이 시련을 행하고자 하면 간략하게 거불성으로 진행해도 무방하다.
본래 연이란 가마의 일종인데 보통 사람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이 타는 가마를 말한다. 신하들이 타는 가마는 각자의 계급과 신분에 따라서 교(轎)라고 부르며 가마를 메는 사람 수에 따라 사인교, 육인교, 팔인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연은 임금님 이상의 신분을 가진 분들이 타는 것으로 불보살님이나 성현이 아니면 연을 탈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연을 들고 동구 밖에 나가서 연 안에 영가를 모시고 온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아서 천도되어야 할 대상인 영가가 칠보로 장엄된 연을 탈 자격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시는 인로왕보살님을 청해 모시는 성격이 강하므로 인로왕보살님께서 타신 연의 뒤를 영가가 따라서 온다는 것이 타당한 표현일 것이다.
시련절차
인로왕보살 번을 맨 앞에 세우고, 연의 뒤로 위패를 모신 상주와 다기, 향로, 촛대를 든 상주와 친족들이 선다. 그 뒤로 재에 오신 손님들이 서서 사찰 입구 시련할 장소로 나간다. 시련장소에 도착하였으면 연을 가로로 내려놓고 그 앞에 인로왕보살 번을 세우고 그 앞에 다시 위패상을 모시고 다기, 향로, 촛대들을 진설하고 차를 올리고 향을 사른 다음 상주와 내빈이 인로왕보살님(번)을 향해서 예배를 올리고 예문에 따라서 의식을 진행하면 된다.
범음에 의한 진행절차는 생략하고 간단하게 뜻만 살피고자 한다.
원문
({옹호게}擁護偈)
{봉청시방제현성}奉請十方諸賢聖 {범왕제석사천왕}梵王帝釋四天王
{가람팔부신기중}伽藍八部神祇衆 {불사자비원강림}不捨慈悲願降臨
{헌좌진언}獻座眞言
{아금경설보엄좌}我今敬設寶嚴座 {봉헌일체성현전}奉獻一切聖賢前
{원멸진로망상심}願滅塵勞妄想心 {속원해탈보리과}速圓解脫菩提果
「옴 가마라 승하 사바하」
역문
(옹호성중을 청하는 노래)
***계 계시옵는 모든 성현들과
범천왕과 제석천왕 사대천왕과
도량내의 팔부신중과 모든 신령님네 받들어 청하오니
자비를 버리지 마옵시고 이 도량에 내리소서
(자리를 받들어 올리는 참말씀)
제가 지금 경건히 칠보로 장엄한 좌석을
모든 성인 현인들께 받들어 올리오니
티끌에 물든 망상심을 버리고서
속히 해탈하여 보리과를 원만히 하소서
「옴 가마라 승하 사바하」
해설
옹호게는 일반적으로 법당이 아닌 여타의 장소에 특별하게 법단을 마련하였을 경우나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전에, 다른 마구니나 잡된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화엄성중들을 청하여 호위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여기 시련에서도 마찬가지로 인로왕보살님을 모시기 전에 먼저 신중들을 청해서 경비를 서도록 하는 의미를 갖고 행하는 의식이다.
게송의 내용을 보면 청하는 대상이 신중단에 헌공을 하기 위하여 거불하거나 청사를 할 때에 청하던 성현과 팔부신중 영기등중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헌좌진언 해설은 신중청 해설등 다른 청에서 많이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의심스런 독자를 위하여 한 가지 말해둘 것은 불보살님께 의식을 할 때의 헌좌게는 ‘묘보리좌승장엄’으로 시작해서 ‘옴 바아라 미라야 사바하’를 진행하며, 이하 신중이나 칠성에 대한 의식은 ‘아금경설보엄좌’로 시작하여 ‘옴 가마라 승하 사바하’를 진행하며, 영가에 대한 헌좌진언은 헌좌게 없이 ‘옴 마니 군다리 훔훔 사바하’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련에 등장하는 헌좌게를 보면 처**터 인로왕보살을 모시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도량의 옹호를 부탁한 화엄성중을 먼저 모시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원문
({다게}茶偈)
{금장감로다}今將甘露茶 {봉헌성현전}奉獻聖賢前 {감찰건간심}鑑察虔懇心
{원수애납수}願垂哀納受 {원수애납수}願垂哀納受 {원수자비애납수}願垂慈悲哀納受
({행보게}行步偈)
{이행천리만허공}移行千里滿虛空 {귀도정망도정방}歸道情忘到淨邦
{삼업투성삼보례}三業投誠三寶禮 {성범동회법왕궁}聖凡同會法王宮
{산화락}散花落(3번)
{나무대성인로왕보살마하살}南無大聖引路王菩薩摩訶薩 (3번)
역문
(차를 올리는 노래)
이제 감로차를 마련하여
성현 전에 받들어 올리오니
재자들의 간절한 정성 살피시사
자비를 드리우사 거두어 주옵시고
어여쁘게 여기시어 받으시옵소서
(발걸음을 내딛는 노래)
천 리에 가득 찬 허공을 떠나갈 때
돌아가다 정 잊으면 곧 정토에 이른다네
삼업을 다하여 정성스레 삼보께 예를 올리고서
성인범부 함께 같이 법왕궁에서 만납시다
꽃을 흩뿌리네 (3번)
지극한 마음으로 크신 성인 인로왕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진행
대중은 합장하고 연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으로 돌고 범음으로 다게를 저숫는다.
다게를 할 동안 연을 가운데 두고 도량을 돌다가 다게가 끝이 나면 행보게를 하면서 연을 모시고, 산화락을 하고, 나무대성인로왕보살을 합창하고 나서 인로왕 번, 연, 위패, 향로, 다기, 상주, 내빈의 순으로 법당을 향하여 가면서 법당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 나서 법당을 향하여 영취게를 하고 보례삼보를 하면 된다. 범음을 모를 경우는 법성게를 하면서 법당 마당을 세 바퀴 돌면 된다.
행보게부터는 대중이 함께 하면 된다.
해설
성현을 청하여 자리에 모시고 차를 올리는 의식이다. 가정에서 손님을 청해 모신 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다는 의미로 차를 드리는 것과 같다. 만약 식당에 손님이 오면 엽차부터 주어야지 엽차도 주지 않고 메뉴판부터 주면 장사하는 기본 자세가 안 된 것이므로 손님이 다시 찾아올 리 만무하다. 정성껏 차를 올리니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행보게는 인로왕보살님을 따라서 절 안에 들어온 영가와 옹호게를 통하여 내림하신 천룡팔부 신장들 모두 함께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떼는 모양을 게송으로 읊는 것이다.
행보게는 시련을 할 때도 진행하며, 대령관욕불공시식을 마치고 영가가 부처님 전에 인사를 하고 위패를 소하기(태우기) 위해 소대로 나갈 때도 하게 되는데, 똑같은 행보게라고 하더라도 올 때의 행보게는 부처님을 뵈러 오는 발걸음이요, 나중의 행보게는 부처님 전에 하직인사를 마치고 떠나는 발걸음이므로 발걸음 무게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행보게의 뜻을 살펴 보면, 천 리나 되는 먼 허공을 떠나가는데 돌아가는 길에 정을 잊어버리면 그곳이 바로 정토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중음신이 되어 7×7일을 지내면서 7일마다 내생의 몸을 결정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든지 좋은 세상에 나고 싶을 것이요, 좋은 세상이란 다름 아닌 정토이다. 그런데 정토에 가지 못하고 다시금 윤회하는 업보의 세계로 떨어지는 것은 숙세에 맺은 밉고 고운 정 때문이다. 먼 길 허공을 가다가 망령된 그 정을 잊어 버린다면 곧바로 모든 은원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업보의 세계가 허물어짐으로써 곧 정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삼업을 던져서 정성을 다하여 불법승 삼보에 예배하여야만 범부와 성인이 함께 법왕궁에 모여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후에 산화락. 님이 오시는 길에 꽃을 흩뿌려 즈려밟고 오시도록 한다.
이와 같이 인로왕보살님을 모시는 길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성을 다하고 인로왕보살님께 귀의하여 그 뒤를 따라서 부처님 전에 이르는 것이다.
원문
({영취게}靈鷲偈)
{영축염화시상기}靈鷲拈華示上機 {긍동부목접맹구}肯同浮木接盲龜
{음광불시미미소}飮光不是微微笑 {무한청풍부여수}無限淸風付與誰
({요잡후 보례삼보}繞後 普禮三寶)
{보례시방상주불}普禮十方常住佛 (1배)
{보례시방상주법}普禮十方常住法 (1배)
{보례시방상주승}普禮十方常住僧 (1배)
역문
(영취산의 노래)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상근기를 보이시니
눈 먼 거북 물 위에 뜬 나무 만나듯 즐거웁네
가섭 존자 빙그레 미소짓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맑은 가풍 누구에게 전했을까
(널리 모든 삼보님께 예배함)
널리 시방에 항상계신 부처님께 절합니다
널리 시방에 항상계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널리 시방에 항상계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진행
법당 마당에 연을 모시고 도착하였으면 세 바퀴 돌고 나서 대중 일동이 불당을 향해서 영취게를 모시고 다시 삼배를 드린다. 인례가 요령을 사용하여 선창을 하고 나면 대중 일동이 같이 합창을 하며 삼배를 드리고 나서 위패를 영단에 모시고 다음에 대령을 진행하면 된다.
해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자마자 화엄경을 3×7일 동안 설하였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었다. 부처님은 그대로 열반에 들까를 고민하던 중에 세 번에 걸친 범천 하느님의 권(勸)에 의해서 법문을 시작하여 중생의 근기를 점점 높여나가는 수의설법을 하셨다.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점차로 법문의 수위를 높여 마지막 법화경에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셨다.
영취게는 영취산 설법 중에 있었던 부처님과 가섭존자 사이의 기이한 인연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한때 영취산에서 법문을 하실 때 법상에 올라가셔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꽃을 한 송이 들어 보이셨다. 다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알아 듣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부처님의 마음이 가섭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흔히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부처님이 세 곳에서 당신의 마음을 가섭 존자에게 전했다고 하는 3처전심 중의 하나인 염화시중(拈華示衆)이다. 선가에서는 모든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는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무언(無言)으로 마음에 통하여 깨닫는 것을 말한다.
영취게의 내용을 보자. 만약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 존자[음광]가 그 뜻을 알지 못해 웃지 않았더라면 마음을 전하지 못했을 것인데 부처님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가 교차하는 것은 마치 눈먼 거북이 물 위에 뜬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과 같이 즐겁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부처님 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한다. 마치 맹구우목처럼. 큰 바다 한 가운데에 사는 눈 먼 거북이는 천 년에 한 번씩 물 위에 올라와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런데 이 거북이가 물 위에 올라왔을 때 물 위에 떠 다니는 나무토막을 만나야만 그것을 의지해서 숨을 충분하게 쉴 수가 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부처님께서 꽃을 들자 가섭이 웃은 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토막을 만난 것처럼 아주 드문 일로써 매우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거행하는 재에서도 부처님과 가섭이 만나듯 부처님과 재자의 기연이 이루어져서 천도하려는 영가의 묵은 업보가 소멸되고, 극락세계에 왕생할 인연이 성취되라는 뜻으로 영취게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널리 시방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네께 각각 절을 올린다.
 
2. 대령
대령(對靈)이란 보통 재대령이라고도 한다. 재(齋)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공양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재의 목적은 돌아가신 영가를 생사번뇌에 의한 고통의 세계에서 구해내서 극락세계로 인도함이다.
대령은 천도재가 시련을 갖춘 큰 경우가 아니라면 천도재의 맨처음에 진행하는 의식으로 천도의 대상이 되는 영가를 청하여 간단하게 공양을 제공하고 법문을 하여 영가를 위로하고 안심시켜서 계속적으로 진행될 천도절차에 따르도록 주문하는 의식이다.
원문
({거불}擧佛)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南無 極樂導師 阿彌陀佛 (1배)
{나무 관음세지 양대보살}南無 觀音勢至 兩大菩薩 (1배)
{나무 접인망령대성 인로왕보살}南無 接引亡靈大聖 引路王菩薩 (1배)
역문
(부처님의 명호를 거명함)
극락의 도사이신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관세음과 대세지 두 큰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망령을 인도하시는 큰성인 인로왕큰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진행
영단을 향하여 법주와 바라지가 함께 절을 하며 이때 신도들도 함께 삼정례를 하도록 한다.
해설
거불은 삼귀의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의식이다. 거불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님의 이름을 거명한다는 뜻인데 부처님의 이름을 거명하는 데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명하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 있다.
대령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극락세계의 교주이신 아미타 부처님, 좌·우보처이신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 그리고 돌아가신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시는 인로왕보살님께 귀의하고 가피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극락세계의 네 성인께 귀의하는 삼귀의를 하는 것이다.
원문
({피봉식}彼封式)
{소청문소}召請文疏 {배헌}拜獻 {삼대가친등중}三代家親等衆 {서가여래}釋迦如來 {유교제자}遺敎弟子
{봉행가지}奉行加持 {병법사문}秉法沙門 {근봉}謹封
({대령소}對靈疏)
{수설대회소}修設大會疏
{개문}盖聞 {생사로암}生死路暗 {빙불촉이가명}憑佛燭而可明 {고해파심}苦海波深 {장법선이가도}仗法船而可渡 {사생육도}四生六道 {미진즉}迷眞則 {사의순환}似蟻巡環 {팔난삼도}八難三途 {자정즉}恣情則 {여잠처견}如蠶處繭 {상차생사}傷嗟生死 {종고지금}從古至今 {미오심원}未悟心源 {나능면의}那能免矣 {비빙불력}非憑佛力 {난가초승}難可超昇
{사바세계}娑婆世界 {남섬부주}南贍部洲 {해동}海東 {대한민국}大韓民國 {산}山 {사}寺 {청정수월도량}淸淨水月道場 {금차}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제당}第當{재}齋 {설향단전}設香壇前 {봉청재자}奉請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영가}靈駕
{금즉}今卽 {천풍숙정}天風肅靜 {백일명명}白日明明 ({야루침침}夜漏沈沈) {전열향화}專列香花 {이신영청}以伸迎請
{나무일심봉청}南無一心奉請 {대성인로왕보살마하살}大聖引路王菩薩摩訶薩 {우복이}友伏以 {일령불매}一靈不昧 {팔식분명}八識分明 {귀계도량}歸屆道場 {영첨공덕}領霑功德 {진원숙채}陳寃宿債 {응념돈소}應念頓消 {정각보리}正覺菩提 {수심변증}隨心便證 {근소}謹疏
{불기}佛紀年月日{병법사문}秉法沙門 {근소}謹疏
역문
(겉봉을 쓰는 양식)
청하는 글을 석가 여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법을 받들어 가지를 행하는 사문 가 삼대의 가친들께 예를 표하오며 삼가 봉합니다.
(영가를 대하는 글)
큰 법회를 개설하는 취지를 밝히는 글
듣자옵건대, 생사의 어두운 길은 부처님의 광명을 의지하여야 밝힐 수 있고, 파도가 깊은 괴로움의 바다는 법보의 배에 의지해야 건널 수 있다고 하셨사옵니다.
사생육도의 중생이 진리에 눈 어두워 개미가 이곳저곳 돌**니듯 여덟 가지 어려움의 지옥 아귀 축생세계를 헤매이게 되는데, 방탕하여 (망령되이) 속정에 빠지면 누에가 고치 속에 갇히듯 속박된다 하였습니다. 슬프옵니다. 나고 ** 윤회를 거듭함이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렀으니, 마음의 근원을 모르고서 어찌 능히 면할 수 있사오며 부처님의 가피력에 힘입음이 아니면 어찌 가히 삼계를 뛰어 넘어 정토에 오를 수 있겠사옵니까?
사바세계 남섬부주 해동 대한민국 시(도) 구(군) 동(면,읍) 번지 산에 있는 사의 깨끗한 수월도량에서 이제 지극한 마음과 정성으로 살아계실 적에 효도를 다하던 시 에 거주하는 가 돌아가신 아버지(어머니) 영가의 49일재를 맞아 지금 하늘에 바람이 고요하고 태양이 밝은 날(어둠이 침침한 때)을 맞아 향화를 나열하여 맞아들이고자 하옵니다.
지극한 한마음으로 대성인로왕 큰보살님께 귀의하며 받들어 청하옵니다. 하오니 영혼이시여, 매하지 마시고 분명한 팔식으로 부처님 도량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은혜와 공덕을 받아 오래된 원한의 묵은 빚을 한생각에 몰록 없애버리고 곧 정각, 보리의 법을 증득하옵기를 삼가 사뢰옵니다.
불기 년 월 일 병법을 맡은 사문 이 삼가 사룁니다.
진행
대령소는 고혼소라고도 한다. 수설대회소 내용을 작성하여 봉투에 넣고 겉봉에는 피봉식의 문장을 써서 부처님 전에 올렸다가 내용을 읽는다.
법주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합장한 채로 소를 읽는데 한문의식으로 대령을 진행할 때는 소성이라고 하여 글자 한자 한자를 또박 또박 힘주어 읽으면 된다.
해설
수설대회소는 영가의 천도를 위한 큰 법회를 개설하는 취지를 밝히는 글이다. 소(疏)라는 것는 본래 궁중에서 신하들이 임금님께 자신의 특별한 의견을 올리고자 할 때나 영가를 조상하는 글이다.
생사의 길이 어둡다는 것은, 낳고죽고 반복하는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의 길이 괴롭다고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상태는 즐거운 것이 될 수 없다. 태어났다고 식구들이 모여서 즐거워하고, 돈 벌었다고, 출세하였다고 좋아하지만 머지 않아서 죽었다고 슬피 울며 괴로워 한다. 이런 식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속에 밝음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어두움을 밝히려면 부처님의 지혜 광명을 의지해야 한다. (佛燭-부처님의 촛불이란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말한다.)
파도가 심한 바다를 잘 건너려면 크고 튼튼한 배가 필요하듯 중생들이 헤매이는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려면 법선(法船) 법보의 배를 가져야만 한다. 즉 진리에 입각한 가르침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살아야만 잘 건너갈 수 있다.
사생육도의 중생이란 중생들의 태어나는 형태에 따라 어미의 모태를 통해서 나는 것, 알에서 나는 것, 습기에서 나는 것, 되어서 변화로 나는 것의 네 가지 모양이 있다. 중생들 업의 선악 정도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당의 여섯 가지 갈래가 있는데 이것을 사생육도(四生六道)라 하고 이들을 돌고 도는 것을 사생으로 육도윤회한다고 한다.
중생들이 윤회하는 원인은 진리에 어두워, 진리를 거스르며 살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삶을 반복하다가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빠지게 된다.
누에가 *잎을 먹고 스스로 명주실을 만들어 자신을 감싸고 마침내 고치 속에 갇히는 것과 같이 중생들도 망령되이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다는 집착, 세속의 정 때문에 지은 악업으로 자신을 삼악도에 가두게 되는 것이다. 개미가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돌**니듯 삼악도의 이곳저곳을 돌**니게 된다. 중생들의 그런 모양을 탄식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나고 죽음이 지금까지 반복되는 것은 마음의 근원이 진리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음이다. 이를 해결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오늘 산 사에 있는 물에 달이 비치듯 깨끗한 도량에서, 에 사는 재자  등이 돌아가신 영가의 49일재를 맞아, 맑고 고요한 낮에, 어둡고 조용한 이 밤에, 향과 꽃을 나열하고 영접하고자 하니, 인로왕보살님을 따라서 오라는 말이다. 돌아와서 이 도량에 이르러 오늘을 계기로 온갖 집착과 업장과 번뇌를 떨쳐버리고 정각을 얻으라는 말이다.
수월도량이라는 말은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도량이란 말이다. 하늘에 떠있는 달이 여러 곳에 있는 물에 고루 비치면 이르는 곳마다 달이 나타나듯이, 곳곳에 있는 도량마다 부처님의 원력이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령소의 내용은, 영가에게 유명계의 중생들을 인도하기로 약속하신 인로왕보살님을 따라서 함께 오라는 것이다. 중생들이 본래 어리석어 살아 있을 동안에 지은 업에 따라 갈 곳이 정해진다. 혹 선업을 많이 지어 복이 넘친다면 모르되 영가 혼자의 힘으로 좋은 세계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로왕보살님을 따라서 도량에 들어와서 49재에 동참하라는 말이다. 영가에게 부처님의 은혜와 공덕을 받아 오래된 원한의 묵은 빚을 한 생각에 없애고 바른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글이다.
원문
({지옥게}地獄偈)
{철위산간옥초산}鐵圍山間沃焦山 {확탕로탄검수도}<H7BF3>湯爐炭劒樹刀
{팔만사천지옥문}八萬四千地獄門 {장비주력금일개}仗秘呪力今日開
역문
(지옥게)
철위산 사이에 있는 옥초산과
끓는물지옥, 불화로지옥, 칼끝지옥, 칼산지옥 등의
팔만 사천 온갖 모든 지옥문이
비밀주의 힘으로써 지금 바로 열리소서
진행
법주의 대령소가 끝나면 바로 이어서 바라지가 태징이나 목탁을 가지고 거불성으로 진행하면 된다. 옛날에는 진행한다는 말을 저순다로 표현하였다. 아마 짓는다[作]는 말이 젓순다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설
『대비바사론』에는 이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다시 그 산을 중심으로 8개의 금산이 겹겹으로 둘러져 있으며, 그 산 사이마다 바다가 있다고 한다. 그 바다 중에 마지막 8번째 바다가 짠 물이고, 그 바다에 4개의 섬부주가 떠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섬부주이다.
그 바깥으로 산 전체가 쇠로 된 철위산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 산 때문에 바다의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또 그 바다 한가운데는 옥초라는 물을 흡수하는 돌이 있는데 크기가 매우 커서 산과 같다고 하여 옥초산이라고 한다. 이 옥초산의 밑에는 아비지옥이 있는데, 아비지옥에서 발생하는 열 때문에 이 옥초산이 항상 더워 바닷물이 쉬임없이 끓어 넘친다고 한다. 또 지구상의 모든 강물이 데워져 바닷물이 쉬임없이 끓어 넘친다고 한다. 또 지구상의 모든 강물이 모두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바닷물이 늘어나서 바다가 넘치지 않는 것은 이 옥초산이 물을 덥혀 증발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철위산 사이에 있는 옥초산은 결국 인간이 끊임없는 번뇌와 집착 때문에 항상 괴로움을 자초함을 상징한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의 여러 군데서 중생들의 끝이 없고 다함이 없는 욕정을 옥초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마치 옥초산이 지옥의 불로 항상 뜨겁게 달궈져서 식을 줄 모르는 상태와 같이 인간의 부질없는 욕정 때문에 모든 악업이 이어지고 사후에는 결국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확탕(湯)이란 끓는물지옥으로 중생이 가기만 하면 하루라도 쉴틈없이 삶아내는 고통을 당하는 지옥이다.
로탄(爐炭)이란 불화로 지옥으로 지글 지글 타오르는 불화로 즉 용광로 속에 중생을 잡아 넣어 불에 타는 고통을 당하는 지옥이다.
검수(劒樹)란 나무의 잎들이 모두 비수와 같이 날카로워 중생들의 몸이 닿기만 하면 갈라져서 피가 흘러내리고, 그 위에 모진 바람이 불어 매우 쓰라림을 당하는 지옥이다.
도(刀)란 도산(刀山)의 준말로 온 산과 들에 모두 칼이 꽂혀 있는데 중생이 내던져져 난도질 당하는 고통을 겪는 지옥을 말한다.
그 외에 인간의 8만 4천의 죄업에 따라 온갖 지옥을 만들어 들어가게 되므로 오늘 비밀스러운 밀교의 진언-주문의 힘으로써 모든 지옥문을 열어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자는 말이 지옥게이다.
원문
({거량급창혼}擧場及唱魂)
{거 사바세계}據 娑婆世界 {차사천하}此四天下 {남섬부주}南贍部洲 {해동}海東 {대한민국}大韓民國 {산}山 {사}寺 {청정수월도량}淸淨水月道場 {원아금차}願我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제당}第當{재}齋 {설향단전}設香壇前
{봉청재자}奉請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엄부}嚴父){영가}靈駕
{재설}再說 {금차}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제당}第當 {재}齋 {설향단전}設香壇前 {봉청재자}奉請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영가}靈駕
{삼설}三說 {금차}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제당}第當 {재}齋 {설향단전}設香壇前 {봉청재자}奉請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영가}靈駕
{영가위주}靈駕爲主 {복위기부}伏爲記付 {상세선망}上世先亡 {사존부모}師尊父母 {다생사장}多生師長 {누대종친}累代宗親 {제형숙백}弟兄叔伯 {자매질손}姉妹姪孫 {원근친척}遠近親戚 {등}等 {각열위영가}各列位靈駕 {차도량}此道場 {내외}內外 {동상동하}洞上洞下 {유주무주}有主無主 {일체애고혼}一切哀孤魂 {제불자등}諸佛子等 {각열위영가}各列位靈駕 {철위산간}鐵圍山間 {오무간지옥}五無間地獄 {일일일야}一日一夜 {만사만생}萬死萬生 {수고함령}受苦含靈 {제불자등}諸佛子等 {각열위영가}各列位靈駕 {내지}乃至 {겸급법계}兼及法界 {보여군생}普與群生 {사생칠취}四生七趣 {삼도팔난}三途八難 {사은삼유}四恩三有 {일체유정무정}一切有情無情 {애고혼}哀孤魂 {불자등}佛子等 {각열위열명영가}各列位列名靈駕 (요령 내림)
역문
(도량에 거듬 및 영가의 이름을 부름)
사바세계 이 사천하 남섬부주의 해동 대한민국 시 산에 있는 청정한 도량 사에서 돌아가신 의 49일재를 맞이하여 시 구 에 거주하는 행효장자 차자 여식  등이 지극한 정성으로 향단을 차리옵고 망엄부(자모) 영가를 청하옵니다.
거듭 말씀드리오니, 망엄부 영가의 49일재를 맞이하여 에 거주하는 행효자  등이 지극한 정성으로 향단을 마련하옵고 돌아가신 영가를 청하옵니다.
재삼 말씀드리오니, 망엄부 영가의 49일재를 맞이하여 에 거주하는 행효자  등이 지극한 정성으로 향단을 차리옵고 망엄부 영가와 영가의 먼저 가신 스승 부모 되는 영가와 오랜 생에 걸친 스승과 부모 되는 영가, 여러 대에 걸친 종친 되는 영가, 형과 아우 누이와 조카와 손자 되는 영가, 멀고 가까운 친척 되는 여러 영가들과 이 도량 안과 밖, 마을 위나 마을 아래의 주처가 있거나 없는 일체의 슬프고 외로운 모든 영가, 철위산으로 둘러쳐진 다섯의 무간 지옥에서 하루낮 하루밤에 만 번 살고 만 번 죽는 고통을 받는 모든 영가들과 아울러 모든 법계 내의 모든 뭇 생령들과 태란습화 네 가지로 태어나는 중생들과 일곱 가지 갈래의 모든 중생들과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는 지옥아귀축생의 삼도와 네 가지 은혜와 욕유색유무색유, 삼유의 세계에서 일체의 정이 있거나 정이 없거나 한 외롭고 슬픈 모든 각각의 영가들을 청하옵니다.
진행
법주가 요령을 세 번 흔들고 나서 거량성으로 낭독하면 된다. 창혼은 세 번을 거듭하게 되는데, 한 번의 창혼이 끝날 때마다 요령을 내리면 된다. 다음의 착어까지 연결된 형태로 법주 혼자서 진행하고 바라지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해설
거량은 진령게의 다음에 등장하는 청혼의식과는 의미가 다르다. 청혼에서는 마음을 모아서 천도하려는 영가가 왕림하기를 간절하게 청하는 것이고, 거량에서는 천도하려는 영가의 이름을 불러서 영가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진 의식이다. 그러므로 문장에 있어서도 다른 수식이 적고 본론만 간단하게 하여 오늘 어느 곳에 사는 행효자 아무개가 돌아가신 아무개 영가의 49일재를 맞아 청한다는 말로 비교적 간단하게 되어 있다.
창혼은 오늘 어떤 연유로 49재를 올리게 되었는가를 알리고 영가를 부르는 의식이다. 에 사는 아들 딸 되는 행효자(녀) 가 돌아가신 영가를 위하여 49일재를 개설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삼설에 ‘영가위주 복위기부 상세선망 사존부모’라는 원문이 있는데, 그 뜻을 해석하여 보면 ‘영가가 위주가 되어 복위가 되거나 기부가 되어’라고 해석된다. 복위기**는 말은 불공 시에 영가 축원을 할 때나 창혼이나 청혼 등에서 계속 나오는 용어인데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행효자가 전체 선망 부모나 다생에 걸친 스승이나 부모를 위한 복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도재를 개설하는 행효자는 49일재에 즉한 영가를 위한 복위로 끝이 나고, 다시 49재에 즉한 영가가 복위가 되어 영가의 먼저 세상의 선망 부모나 스승이나 친척이나 형제 간이나 누이 간이나 숙질 간이나 손자 손녀가 되는 영가 가운데 위가 되는 이를 위하여는 복위(伏爲)가 되고 아래가 되는 이를 위하여는 기부(記付)가 되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러한 발원을 해야 하는가
일본 일련종을 창종한 니찌렌 대사는 극락에 가기 위하여 염불을 하는 자는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하였다. 자신의 부모님이 모두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혼자만 극락에 가려는 마음이 나빠서 극락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영가가 극락에 가려면 영가의 앞 길에 장애가 없어야 한다. 극락에 가려는 영가의 부모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든가 무주고혼으로서 구천을 떠돌아 다닌다면 49재를 받아 극락에 가려는 영가의 앞 길에 장애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영가에게 신세진 모든 존재들이, ‘너만 혼자 극락에 가려느냐’고 영가의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49재를 하는 영가의 천도를 잘 하기 위해서 영가의 선망 부모님들이 모두 괴로움의 길에서 벗어나 좋은 세계에 가서 나야만 한다. 영가의 진정한 천도를 위하여 영가가 복위가 되고 혹은 기부가 되어, 은혜 입은 모든 영가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기원해야 하는 것이다.
원문
({착어}着語)
{금일}今日 {영가}靈駕 {생본무생}生本無生 {멸본무멸}滅本無滅 {생멸본허}生滅本虛 {실상상주}實相常住
{영가}靈駕 {환회득}還會得 {무생멸지 일구마}無生滅底 一句
({양구}良久)
{부앙은현현}俯仰隱玄玄 {시청명력력}視聽明歷歷 {약야회득}若也會得 {돈증법신}頓證法身 {영멸기허}永滅飢虛
{기혹미연}其或未然 {승불신력}承佛神力 {장법가지}仗法加持 {부차향단}赴此香壇 {수아묘공}受我妙供 {증오무생}證悟無生
역문
(영가에게 이르는 법어-말씀)
금일 영가 망엄부 영가시여!(남양 홍씨 길동 영가시여), 태어남이 본래 없고 죽음 또한 본래 없네. 나고 죽음이 본래 없으므로 참된 세계에 항상 머무르도다.
금일영가 영가시여, 나고 죽음이 없는 이 한 소식을 아십니까
(잠깐 있다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구부리면 숨게 되고 쳐들면 나타나서
보고 들음이 밝고 역력하구나!
만약 이 도리를 알아서
단박에 진리의 모습을 깨달으면
영원히 굶주리고 허기짐을 면할 것이로다
혹 그렇지 못하다면 부처님의 위신력을 따라 법의 가지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왕림하시어 저희들이 드리는 묘한 공양 받으시어 태어남(과 죽음)이 없음을 확연히 깨달으소서
진행
거량의 진행에서 말한 것처럼 법주가 혼자서 거량에 이어서 진행하면 된다. 법주는 다만 영가를 위하여 법문을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법계관을 하면서 진행을 해야 한다.
해설
착어는 영가로 하여금 진리의 법계에 들어 해탈하게 하려는 법문이다.
법계의 참된 모습은 어떠한 모양일까. 진여 법계는 고정되어 있는 세계일까. 여기 착어의 내용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법계 내에서 중생들의 모습은 연기적인 관계 속에서 그 모양을 드러내었다가 감춘다. 중생들이 보기에는 드러냈을[生] 때는 태어남으로, 감추었을[滅] 때는 죽음으로 인식되어 삶과 죽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생멸함이 없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착어에서 ‘생멸본허 실상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생의 본래 모습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은[숨었다], 현[나타났다]하며 연기적인 관계로 자유로이 바뀌면서 존재한다. 그런데 중생들이 스스로 집착하여 고개를 들어 나타나면 태어났다고 하고 고개를 수그려서 숨게 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영가로 하여금 이와 같은 진리의 모습을 바로 깨닫도록 하여 집착을 버리고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착어를 하는 본래 목적이다.
만약 착어 법문을 설할 때에 영가가 깨닫기만 하면 49재는 이미 마쳐진 것이고, 여타의 다른 법문은 사실상 소용이 없다. 바로 여기에서 천도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음으로 인해 법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영가들이 있게 마련이므로 다시 자비심을 발하여 진언을 통한 삼밀가지에 의하여 영가를 청하고 공양하도록 하는 것이다.
원문
({진령게}振鈴偈)
{이차진령신소청}以此振鈴伸召請 {금일영가보문지}今日靈駕普聞知
{원승삼보력가지}願承三寶力加持 {금일}今日({야}夜){금시래부회}今時來赴會
{보소청진언}普召請眞言
「나모 보보제리 가리다리 다타**야」
역문
(요령을 울리는 노래)
이 요령 울려 (부르고) 청하오니
오늘 영가는 모두 널리 들으시고
삼보님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지금 이 시각에 모두 함께 모이소서.
널리 청하는 참말씀
「나모 보보제리 가리다리 다타**야」
진행
진령게는 법주와 바라지가 함께 진행하는 것인데, 법주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요령의 방울이 한 쪽 면만 치도록 흔들면서 앞 귀절을 젓수면 바라지는 목탁을 사용하여 뒷구절을 젓순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행하면 된다.
보소청진언은 요령을 흔들고 나서 법주가 합장하고 보소청진언을 소리내서 외우고 요령을 흔들면서 진언을 세 번 외우면 된다.
해설
요령을 울려서 영가를 부르고 청하는 노래를 진령게라고 한다. 요령은 본래 범종에서 유래된 것으로 축소된 범종이다. 특히 밀교에서 의식을 집전할 때 금강령이라고 하여 중요한 법구의 하나로 쓰인다. 종은 중생의 마음 속을 아주 깊이 파고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요령을 사용하여 의식을 집전해보면 알겠지만 요령을 잘 사용하면 가슴 깊이 요령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작은 형태의 종인 요령을 울리면서 온 법계 내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영가들이 이 소리를 듣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해 나가는 스님들의 위력을 힘입어서 천도하는 장소에 오도록 발원하고 관(觀)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요령 소리가 나의 가슴을 울리듯 영가의 마음을 울리도록 해야 한다. 요령 소리는 눈먼 장님이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울리는 벨 소리와 같다. 삼독 번뇌로 말미암아 눈앞이 어둡고 캄캄하여 어둠의 세계에서 헤매는 영가를 인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원문
({고혼청}孤魂請)
{일심봉청}一心奉請{인연취산}因緣聚散 {금고여연}今古如然 {허철광대영통}虛徹廣大靈通 {왕래자재무애}往來自在無碍 {금일}今日 {지성}至誠 {천혼재자}薦魂齋者 {복위}伏爲 {영가}靈駕
{유원}唯願 {승불신력}承佛神力 {장법가지}仗法加持 {내예향단}來詣香壇 {수첨법공}受霑法供
{일심봉청}一心奉請{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금일지성}今日至誠 {천혼재자}薦魂齋者 {복위}伏爲 {영가}靈駕
{유원}唯願 {승불신력}承佛神力 {장법가지}仗法加持 {내예향단}來詣香壇 {수첨법공}受霑法供
{일심봉청}一心奉請{실상이명}實相離名 {법신무적}法身無跡 {종연은현}從緣隱現 {약경상지유무}若鏡像之有無 {수업승침}隨業昇沈 {여정륜지고하}如井輪之高下 {묘변막측}妙變莫測 {환래하난}幻來何難
{금일}今日 {지성}至誠 {천혼재자}薦魂齋者 {복위}伏爲 {영가}靈駕 {영가위주}靈駕爲主 {복위기부}伏爲記付 {상세선망}上世先亡 {사존부모}師尊父母 {다생사장}多生師長 {누대종친}累代宗親 {제형숙백}弟兄叔伯 {자매질손}姉妹姪孫 {원근친척}遠近親戚 {각열위영가}各列位靈駕 {내지}乃至 {차도량내외}此道場內外 {동상동하}洞上洞下 {유주}有主{무주}無主 {일체애고혼}一切哀孤魂 {제불자}諸佛子 {등}等 {각열위영가}各列位靈駕
{유원}唯願 {승불신력}承佛神力 {장법가지}仗法加持 {내예향단}來詣香壇 {수첨법공}受霑法供
역문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어 청하옵니다.
인연이 모였다가 흩어짐은 옛과 지금 다르잖아 (우주의 본체) 텅텅 비어 넓고 크고 신령스레 통하여서 오고감에 자유로와 아무런 걸림없어라.
오늘 지극하온 정성으로 시(도) 구 동 번지에 거주하는 행효자 가 망엄부 영가를 천도하고자 하오니,
오직 원컨대 삼보님의 위신력과(에 힘입어) 법의 가지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내려와서 법의 공양 받으소서(법공양에 *으소서).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어 청하옵니다.
만약 부처 경계 알고 싶으면 그 마음 맑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망령된 생각 내지 모든 집착 멀리 여의어 마음에 모든 걸림 없게 하라.
오늘 지극하온 정성으로 시(도) 구 동 번지에 거주하는 행효자 가 망엄부 영가를 천도하고자 하옵니다. 오직 원컨대 삼보님의 위신력과 법의 가지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내려와서 법의 공양 받으소서(법공양에 *으소서).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어 청하옵니다.
참된 모양은 이름을 떠나 있고, 법의 몸은 자취 없어, 인연따라 들고남은 마치 거울 속의 모양이 있다가 없음 같고, 업을 따라 오르내린 우물 속의 두레박과 같아 묘한 변화 예측하기 어렵구나. (환과 같은 세상을) 오고 감이 어찌하여 어려우랴
오늘 지극하온 정성으로 시(도) 구 동 번지에 거주하는 행효자 가 망엄부 영가와 영가를 복위나 기부로 하여, 먼저 세상에서 스승이나 부모가 되었던 영가, 오랜 생에 걸친 스승이나 어른이 되었고, 누대에 걸쳐 형이나 아우가 되었던 영가,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되었던 영가, 누나나 누이가 되었던 영가, 조카나 손자 되었던 영가, 원근의 친척이 되었던 영가 등 각각 모든 영가와 이 도량 안팎의 마을 위나 아래의 주처가 있거나 없는 일체의 슬프고 외로운 혼과 모든 불자 등을 포함한 각각의 모든 영가시여,
오직 원컨대 부처님의 위신력과(에 힘입어) 법의 가지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내려와서 법의 공양 받으소서(법공양에 *으소서).
진행
고혼청은 법주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합장 반배하고 나서 ‘일심봉청’을 하면서 요령을 잡고 계속 염불성으로 진행을 하다가 ‘유원’에서 요령을 한 번 채고 나서 수첨법공에서 내리면 된다.
이와 같이 삼청을 하면 된다. 법주가 삼청을 다 하고 나면 바라지는 목탁이나 태징을 사용하여 향연청을 세 번 외우고 가영을 하면 된다.
해설
고혼청은 천도하려는 영가와 함께 영가가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신세를 진 인연있는 모든 영가를 청하여 천도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한마디로 고혼을 청하는 의식이다.
불교에서 천도하려는 범위는 매우 넓고 큼을 알 수 있다. 영가 하나를 천도하기 위해서 그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대상들까지 은혜 갚음이 확대되는 그야말로 대자대비 크신 슬픔·크신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삼청을 하는 데 등장하는 문장은 문자 그대로 선(禪)적인 색채가 농후한 진여법계의 모습을 읊은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거니와 문장풀이를 열쇠로 하여 그 모습을 잘 관해보는 것이 좋겠다.
만약 법계의 모습에 대한 관이 없이 막연히 염불소리에만 신경을 쓴다면 부처님의 제자라기보다는 한낱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부정하신 바라문의 지위를 누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을 봉행하여 진정으로 영가를 천도하려면 집전하는 스님이 여법하게 법계를 관함으로써 영가에게도 법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시기 전에 반드시 정(定)에 들어서 중생들의 근기를 관찰하시고 나서 그들의 근기에 맞는 법문을 하셨던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간절하게 세 번 영가를 청하는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 가운데 바쁘다는 구실로 단청이나 재청으로 끝낼 수 없느냐는 질문이나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거나 올바로 깨달은 이라면 단 한 번의 청으로도 충분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천도하려는 대상인 영가는, 두텁고 무거운 업장 때문에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업력에 끌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져 신음하거나, 갈 데를 알지 못해 중음신으로 떠도는 답답한 상태에 처하여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천도될 수 없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신통력이 제일인 목건련도 자신의 어머니 청제부인을 천도할 때 단 한 번으로 천도된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시고, 신통력이 으뜸가는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도 한 번의 천도로 어머니를 천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목건련의 고사에 비추어 볼 때 지옥에 떨어진 조상을 천도하려면 세 번 이상 천도를 행해야 된다. 물론 유(類)가 다르기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통하여 고통이 쉴새없는 무간지옥에서 고통이 덜 심한 소혹암지옥으로, 두 번째 단계에서 여러 보살들을 청하여 대승경전을 외운 공덕을 통하여 흑암지옥에서 벗어나 아귀로, 세 번째 단계에서 여러 보살들을 청하여 마흔 아홉 개의 등을 켜고 산 목숨을 놓아주고 당번을 만들어 장엄하고서 아귀를 벗어나 축생계에 떨어져 왕사성에 어미개로 환생하고, 네 번째 단계에서야 칠월 보름날 우란분재를 베풀고 부처님 앞에 개를 데리고 나가 오백계를 받고서야 도리천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도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이번 한 번만 지내면 다 되느냐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나약하고 박약한 믿음은 안 된다. 자신이 입은 은혜를 생각해 볼 때 돈을 아까워 하는 인색한 마음으로 천도를 한다면 백 번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원문
{향연청}香煙請 (3번)
({가영}歌詠)
{제령한진치신망}諸靈限盡致身亡 {석화광음몽일장}石火光陰夢一場
{삼혼묘묘귀하처}三魂渺渺歸何處 {칠백망망거원향}七魄茫茫去遠鄕
역문
향을 사러 청하옵니다
(노래로 맞아들임)
모든 영가시여, 기한(목숨)이 다하여 몸을 잃었으니
돌불같이 빠른 세월 속의 한바탕 꿈이로다
삼혼은 고요히 어디로 돌아 가셨으며
칠백은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렸네
해설
諸靈限盡致身亡은 직역하면, ‘모든 영가시여, 기한이 다하여 몸을 잃어버리는 데에 이르렀으니’가 된다. 기한이란 인간이 살아 있을 때의 수명을 말한다. 수명이 다하면 몸이 죽게 되므로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이 나고, 그때부터 중음신이 되어 다음 생을 준비하게 된다. 그 중간적인 존재를 불교에서는 영가라고 부르고 일반인들은 보통 귀신이라고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몸이 망가져서 목숨을 마치고 죽으면 무(無)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인간의 주체를 몸[身] 즉 물질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정신(精神)이 주인이 되어 몸을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 때문에 여기 향연청의 가영에서 기한이 다하여 몸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가 가지고 있는 몸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石火光陰夢一場이란 ‘돌불같이 빠른 세월이 오직 한바탕 꿈’이라는 말이다. 돌불이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 두 개를 양손에 집어 들고서 탁 부딪치면 거기에서 잠깐 일어나는 불이다. 인간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두 개의 돌을 부딪쳐서 번쩍하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불과 같이 빠른 세월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한바탕 꿈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두 개의 돌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불과 같이 빠른 세월 속에 벌어지는 인생이란 결국 잠깐 동안 꾸는 꿈과 같다는 뜻이다. 잠을 잘 때에 잠깐 꾸는 꿈인 줄을 모르고 긴 시간인 듯 울고 불고 하다가 잠을 깨고 나면 허망한 경우가 있다. 우리 인생도 잠깐 동안 꾸는 한바탕 꿈과 다름이 없으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三魂渺渺歸何處의 삼혼(三魂)이란 중생들의 몸 가운데 있는 세 가지의 정신작용을 말하는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첫째는 업식(業識), 둘째는 전식(轉識), 셋째는 상속식(相續識)을 말한다. 또 『지장보살발심인연시왕경』에서는 삼혼을 세 가지의 혼식, 즉 태광업혼신식(胎光業魂神識), 유정전혼신식(幽精轉魂神識), 상령현혼신식(相靈現魂神識)으로 말한다.
이 3혼설의 근원은 도교의 3정설(三精說)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업식이나 태광업혼신식은 홀연히 무명을 일으켜 중생이 되었을 때에 생겨난 업혼을 말하고, 전식이나 유정전혼신식은 홀연히 무명을 일으켜 중생계에 떨어진 이후 지금까지 윤회하면서 지은 업으로 된 혼이다. 상속식이나 상령현혼신식은 현재까지의 과보를 바탕으로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혼이다.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세 가지의 작용을 말한다. 근본적인 마음인 심(心-마음)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지를 일으키는 작위(作爲)적인 마음인 의(意-의지), 모든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마음인 식(識-분별, 의식)을 3가지 혼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七魄茫茫去遠鄕의 칠백(七魄)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식(識)에다 제7 말나식을 합하여 일곱 가지 신식(神識)을 말한다. 그리고 『발심인연시왕경』에서는 작음백신식(雀陰魄神識), 천적백신식(天賊魄神識), 비독백신식(非毒魄神識), 시구백신식(尸垢魄神識), 취폐백신식(臭肺魄神識), 제예백신식(除穢魄神識), 복시백신식(伏尸魄神識)의 7백(魄)을 말하고 있다.
『아함경』에 의하면, 인간은 육근 가운데 오근(五根-눈귀코혀몸)이 인식한 것을 제6의 의근(意根)이 통합작용하여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판단을 내린다고 말씀하셨다. 이 육근의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항상 아집을 일으켜 윤회를 발생시키는 제7 말나식을 포함하여 칠백이라고 한 것이다.
삼혼은 정신적인 부분으로서 물질을 갖고 있지 않고, 칠백은 육체적인 요소를 가진 삼혼이 깃드는 장소를 의미한다. 인간이 살아있을 때 삼혼은 칠백에 의지하여 있지만 죽음이라는 선을 통하여 제 각각 분리되어 흩어지게 된다.
보통 일반에서는 혼백이라고 말할 때, 혼은 가벼워 위로 뜨는 것으로 백은 무거워 밑으로 가라앉는 것으로 이해하여, 혼식이 위로 떠서 빠져 나가고 남은 시신을 체백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의식은 사람이 죽은 뒤 영가를 천도하려고 49재를 진행하는 것이다. 향을 피우고 영가를 청하여, 혼신은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고 혼신이 깃들어 살던 육신도 이미 화장을 하거나 땅에 묻혀서 지수화풍의 4대로 흩어졌으니, 집착하고 살던 삼혼과 칠백이 모두 헛것이니 집착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원문
{영가}靈駕 {기수건청}旣受虔請 {이강향단}已降香壇 {방사제연}放捨諸緣 {부흠사전}俯欽斯尊
{영가}靈駕 {일주청향}一炷淸香 {정시}正是 {영가}靈駕 {본래면목}本來面目 {수점명등}數點明燈 {정시}正是{영가}靈駕{착안시절}着眼時節 {선헌조주다}先獻趙州茶 {후진향적찬}後進香積饌 {어차물물}於此物物 {환착안마}還着眼
(良久)
{저두앙면무장처}低頭仰面無藏處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
{금일}今日 {영가}靈駕 {기수향공}旣受香供 {이청법음}已聽法音 {합장전심}合掌專心 {참례금선}參禮金仙
역문
영가시여, 이미 간절한 청을 받아 이 향단에 오셨으니,
모든 인연 놓아버리고 구부려서 이 제물을 흠향하시옵소서.
영가시여, 한 자루 맑은 향은 본디 영가의 본래면목이요, 몇 점의 밝은 등은 바로 영가의 안목입니다. 먼저 조주스님의 차를 드리옵고 후에 향적세계의 진수를 드리리다. 영가시여, 이 제단의 공양물을 돌이켜 보십니까
(한참 있다가 요령을 세 번 울린다)
고개 수그리고 얼굴 들어도 어느 한 곳 감출 곳 없는데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구나.
금일 영가시여,
이미 향기로운 공양 받으시고 법음을 들으셨으니 합장하고 마음을 오롯이하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소서.
진행
가영 뒤에 오는 법문은 법주 혼자서 낭독하면 된다. 계속 낭독해 나가다가 환착안마에서 잠시 쉬었다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계속 낭독하며 끝에 가서 요령을 내리면서 낭독을 마치면 된다.
해설
대령은, 천도하려는 영가를 청하여 본격적인 천도절차에 앞서 영가로 하여금 다른 의식절차에 순종하게 하는 준비의식이다.
우리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금강산 구경이라 할지라도 배가 불러야 구경할 생각이 난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도라는 것은 올바로 살지 못하고, 올바로 가지 못한 영가를 대상으로 이들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다른 길로 가지 말고 부처님 나라로 바로 가도록 법문을 일러주고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 하더라도 듣는 대상이 다른 생각을 한다면 그 법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즉 영가를 위하여 아무리 좋은 법문을 준비하고 영가를 위한다는 마음을 내었다고 하더라도 영가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대령의 목적은 우선 먼 길을 오느라고 애쓴 영가에게 차를 대접하여 목을 축이도록 하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선 간단하게 대접을 하고, 뒤에 가서 잘 대접할테니 딴 마음을 먹지 말고 의식절차에 순응하라는 것이 대령의 뜻이다.
영가에게 하는 대령의 법문 내용은 ‘기수건청 이강향단 방사제연 부흠사전’이다. 즉 이미 제자가 영가를 천도하려는 간절한 뜻으로 위의 순서에서 영가를 청하였던 바 기왕에 왔으니 모든 생각과 번뇌 즉 분별을 쉬어버리고 고개를 숙여서[俯] 차려놓은 공양물과 피운 향을 흠향하라는 것이다.
한 자루 맑은 향이 영가의 본래면목이란 말은 영가가 본래는 명계를 헤매는 중생이 아니라 자신의 면목이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것이요, 등불을 밝힌 것 또한 영가의 지혜가 본래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향과 촛불을 밝히는 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배고픔이나 주림, 공포심 등으로 헐떡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절에서 봉행하는 제사에는 술을 쓰지 않고 맑은 물을 써서 번뇌를 맑히는 **을 하였다. 먼저 조주스님께서 누구에게나 권하였던 맑은 차를 먼저 올리는 것이니, 맑은 차로서 마음을 맑히고 난 후 그 맑은 마음으로 진수를 들라는 말이다.
‘환착안마’라는 말은 ‘다시금 영가야 보고 있느냐’는 말이니 이와 같이 묻는 것은, 다시금 영가에게 주목을 하도록 주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요령을 세 번 울려서 법문을 다시 환기시킨다.
고개를 수그리거나 얼굴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더라도 본래면목은 어느 한 곳도 감추거나 숨을 곳이 없으므로 어두운 생각을 떨쳐버리고 오늘 정신차려 깨달으라는 말이다. 얕은 입장에서 말한다면 누구든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이요, 높은 차원에서 말한다면 영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성, 즉 본래 면목은 현재는 비록 번뇌에 덮여 있다 하더라도 밝은 부처의 성품으로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신통력이 있던 바라문 삼형제가 **오는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한 사람은 구름 속에 한 사람은 바위 속에, 한 사람은 물 속으로 숨었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는 경전 속의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얕은 차원의 이야기다. 그러나 실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번뇌나 망상도 본래는 없는 것이니, 이 법문을 통하여 번뇌로운 영가를 안심시키려는 뜻이다.
물과 구름의 본성은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다. 구름이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는 말은 당나라 때 스님인 약산 유엄의 말이다. 당나라 정승 이고가 찾아왔을 때 약산선사는 돌아**도 않고 경만 보고 있었다. 정승도 절을 하지 않고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얼굴을 보니 천 리의 소문만 못하구나.”
이에 선사가 정승을 불렀다.
“상공(相公)”
정승이 대답하니 선사가 말했다.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히 여기는가”
정승이 얼른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약산선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느니라.”
이 이야기에서 연유된 말이다. 선적인 차원에서 영가에게 본성자리를 밝히라는, 말 아닌 말이므로 자세한 해석은 하지 않는다. 또 말로 설명을 한다하더라도 그 깊은 뜻은 선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고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하니 영가들은 얌전하게 의식절차에 순종하여 향기로운 공양도 받고 법음도 들었으니 부처님께 예배를 하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법문을 들은 자는 부처님께 예배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많은 성인과 현인들이 왔다 가셨지만, 그 가운데 억지를 쓰지 않는 참으로 옳고 밝은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은 오직 그렇게 살았던 유일한 분이다. 진리를 바로 아는 자가 돌아가 의지할 곳은 오직 부처님이고, 당연히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예배를 하라는 말이다.
금선(金仙)은 부처님은 금색의 몸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도교적이고 중국적인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다. 
3. 관욕
관욕(灌浴)은 영가의 다겁생 이래의 죄업을 씻어내는 의식이다.
관욕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욕방을 만들어야 한다. 법당 한쪽에 병풍을 둘러 욕실을 만들고 영가가 세면하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향을 넣어서 만든 향탕수와 양치를 할 수 있도록 대접에 청수 한 그릇과 치솔, 치약 등 양치도구 일습, 비누와 수건 등 세면도구 일습, 태워서 영가에게 공양할 지의(종이로 접은 옷)와 지의를 태울 기와 한 장과 부젓가락, 영가에게 드리는 속옷과 겉옷, 양말이나 버선, 신발 등을 준비하여 진설한다. 그리고 병풍의 앞에는 남신구(南身軀), 여신구(女身軀)라고 써서 붙인다.
대령을 진행할 때에 영단이 아닌 관욕방 앞에 별도로 대령상을 설치하고 간단하게 진설하고서 대령과 관욕을 같이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원문
<{인예향욕편}引詣香浴篇>
{제불자}諸佛子 {상래}上來 {이빙불력법력}已憑佛力法力 {삼보위신지력}三寶威神之力 {소청인도}召請人道 {일체인륜}一切人倫 {급무주고혼}及無主孤魂 {유정등중}有情等衆 {이계도량}已屆道場 {대중성발}大衆聲 {청영부욕}請迎赴浴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長句大陀羅尼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나막 알야바로기데새바라야 모디 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까리다바 이맘 알야바로기데새바라 다바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이샤미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 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계 아로가마디 로가디가란데 혜 혜 하례, 마하모디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 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 도로 미연데 마하미연데, 다라 다라 다린나례새바라, 자라 자라 마라 미마라아마라 몰데, 예혜 혜 로계새바라 라아 미사 미나사야 나베사미사 미나사야 모하 자라 미삼 미나사야, **** 마라** 하레 바나마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 소로 못댜 못댜 모다야 모다야,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싯다야 사바하 마하싯다야 사바하 싯다유예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목카 싱하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욕다야 사바하, 상카 섭나 네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구타다라야 사바하, 바마 사간타 니샤 시체다 가릿나이나야 사바하, 먀가라 잘마 니바사나야 사바하,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나막 알야바로기데새바라야 사바하」
{정로진언}淨路眞言
옴 소싯지 나자리다라 나자리다라 모라다예 자라자라 만다만다 하나하나 훔 바탁」
({입실게}入室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기입삼도력사생}幾入三途歷四生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
역문
[영가를 인도하여 향탕에 나아가 목욕하도록 함]
모든 불자들이시여, 위에서 이미 부처님의 법력과 삼보님의 위신력으로 인도의 청을 받은 모든 영가와 무주고혼과 유정들이시여, 이미 도량에 오시었거든 대중들이 태징과 목탁 울려 청해 모시오니 욕실로 나가소서.
신비하고 오묘하신 큰 다라니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 새바라야 사바하」
깨끗한 길의 참말씀
옴 소싯지 나자리다라 나자리다라 모라다예 자라자라 만다만다 하나하나 훔 바탁」
(욕실에 드는 게송)
한번 본래의 마음자리 등진 후에
그 얼마나 삼도와 사생의 윤회에 해매었던고
오늘 관욕으로 번뇌에 물듬을 씻어 없애면
인연따라 옛날의 마음자리 저절로 돌***
진행
대령이 끝나고 나면 관욕을 진행하게 된다. 서두에 말한 대로 관욕방을 만들어 필요한 도구 일습을 갖추어 놓은 상태에서 관욕을 진행한다. 법주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인예향욕’ 제목을 낭독하고 나서 합장하고 소성으로 소를 읽은 다음, 법주와 바라지가 목탁과 태징 요령 따위로 함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 번 독송하고 나서 정로진언을 세 번 외우고 입실게를 합송한다.
종두는 법주가 정로진언을 외울 때에 위패를 욕실 안에 모시고 관욕쇠(종을 다섯번 침)를 쳐야 한다. 입실게를 외울 때에 재자들은 게송에 맞추어서 관욕방을 향하여 삼배를 드리도록 한다.
해설
관욕은 영가가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지은 죄와 번뇌를 씻어 주는 절차이다. 영가를 불러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진언을 외우고 법문을 일러줌으로써 영가가 향탕수에 목욕하여 죄의식을 씻도록 하는 것이 관욕의 근본 뜻이다.
목욕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중생들이 하는 것이지, 육신을 버린 영가가 무슨 형체가 있어서 목욕을 하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또 육신이 없어진 상태에서 목욕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한평생을 자기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살다가 육신의 명이 다하면 임종을 맞아 죽게 된다. 사는 동안에 착하게 살아서 선업을 행하고 공덕을 짓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므로 남에게는 불편함이나 손해를 끼치게 되어 악업을 짓는 경우가 많다. 사는 동안에 보고 듣고 행동하고 말한 모든 원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아뢰야식이라는 창고에 차곡차곡 종자로 저장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후생은 창고에 저장된 종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병든 종자, 이른바 악업을 많이 저장한 사람은 악도에, 좋은 종자, 이른바 선업을 많이 저장한 사람은 선도에 날 것이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의 종자를 짊어지고 다닌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종자에 따라 밝음과 어두움이 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에 밝고 맑게 산 사람은 죽은 후에도 맑고 밝아서 현명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살아 있을 때 어둡게 산 사람은 죽은 뒤에도 어둡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두움을 가진 존재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법문을 해준다 하더라도 그 법문을 들을 수가 없다. 법문을 들려주어 선도(善途)에 인연을 가지려면 어두움을 씻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중생들이 살아 있을 때는 육신의 장애에 의하여 왕래가 불편하였지만, 죽음을
통해서 육신이 없어지고 가벼운 상태가 되면 왕래가 자유롭다. 이 점을 활용하여 적절하게 공양을 제공하고 법문을 해주는 등 여러가지 의식절차를 통하여 천도를 진행하게 된다.
극락이라는 곳은 아주 깨끗한 곳이므로 그곳에 가려면 깨끗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극락에 가기 위한 통과의례로 관욕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데, 중생이 살아 있을 때에 육신을 ‘나’라고 집착하고 살았으므로 비록 죽은 상태라 하더라도 그 ‘나’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붙들고 매달린다.
사람이 임종할 때에 아주 미세한 4대로 구성된 몸을 가지고 나간다고 한다. 따라서 육신은 죽었지만 ‘나’라는 것이 아주 없어졌다는 인식을 갖지 못한다. 비록 죽었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므로 비록 그것이 허깨비 같은 상태의 몸일지라도 목욕이라는 의식절차를 통해서 영가자신이 깨끗한 상태가 되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천수경에서 보면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 하여, 죄는 본래 자성이 없으므로 망심만 없애면 죄도 또한 없어지게 되는 것이요, 죄와 망심이 함께 없어져서 공한 상태가 된 것을 참된 참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관욕의 의미도 이와 같이 망심을 씻어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영가를 관욕방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자는 본문에 이르기를, ‘모든 불자들아, 불법승 삼보님의 힘과 위신력에 힘입어서 이미 왔거든 대중들의 염불소리에 따라 욕실로 나가라’고 염불을 한다.
그래도 미심쩍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서 관음보살님의 위신력을 빌어쓰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서 정로진언을 통한 삼밀가지를 통하여 영가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곧바로 욕실에 들도록 하고, 다시 욕실에 드는 영가에게 입실게 법문을 하는 것이다.
영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똑바로 일러주는 말이 ‘한 번 마음자리를 등진 후에 그 얼마나 삼악도와 태란습화 사생의 모습으로 중생계를 윤회하면서 헤매었던고’이다. 청정한 자성의 힘을 빌어쓰지 않고 무명번뇌를 일으켜서 그 번뇌에 의한 업보에 따라 낳고 죽고 하였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느냐. 그러하니 오늘 목욕으로써 번뇌로운 마음을 씻어 버리기만 하면 인연따라 자연스레 본래의 마음자리를 회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원문
<{가지조욕}加持操浴>
{상부}詳夫 {정삼업자}淨三業者 {무월호징심}無越乎澄心 {결만물자}潔萬物者 {막과호청수}莫過乎淸水 {시이}是以 {근엄욕실}謹嚴浴室 {특비향탕}特備香湯 {희일탁어진로}希一濯於塵勞 {획만겁지청정}獲萬劫之淸淨 {하유목욕지게}下有沐浴之偈 {대중수언후화}大衆隨言後和
{아금이차향탕수}我今以此香湯水 {관욕고혼급유정}灌浴孤魂及有情
{신심세척영청정}身心洗滌令淸淨 {증입진공상락향}證入眞空常樂鄕
{목욕진언}沐浴眞言 「옴 바다모 사니사 아모가 아레 훔」
{작양지진언}嚼楊枝眞言 「옴 바아라하 사바하」
{수구진언}漱口眞言 「옴 도도리 구로구로 사바하」
{세수면진언}洗手面眞言 「옴 삼만다 바리 숫제 훔」
역문
가지로써 목욕시킴
자세하게 말하건대 삼업을 맑히는 데는 마음을 깨달음을 넘는 것이 없고, 만물을 청결하게 하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가 엄숙한 욕실에 특별히 향탕수를 준비하여 이 한번의 씻음으로써 모든 티끌과 번뇌를 씻어내어 만겁의 청정함을 얻게 하려 합니다.
아래 목욕게송이 있으니 대중은 말을 따라 합창하시오.
영가시여, 내가 이제 향탕수를 써서
고혼과 유정들을 관욕하오니
몸과 마음을 씻어 내어 청정하게 하여
진공을 깨달아 상락향에 돌아가소서
목욕하는 참말씀
「옴 바다모 사니사 아모까 아레 훔」
양치하는 참말씀
「옴 바아라하 사바하」
입을 헹구는 참말씀
「옴 도도리 구로구로 사바하」
손과 얼굴 씻는 참말씀
「옴 삼만다 바리 숫제 훔」
진행
법주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가지조욕’하고 제목을 외우고 나서 합장하고 관욕소를 낭독한 다음, 순서에 따라 영가를 관욕하는 진언을 차례로 외우면서 계인을 짓는다.
①목욕진언을 할 때는 양손 무명지와 약지를 안으로 깍지껴서 손바닥 속에 넣되 오른쪽 손이 왼쪽 손을 누르게 하고 두 장지를 펴서 끝을 맞대고 양손 둘째 손가락으로는 장지 등을 누르고 두 엄지 손가락으로 장지의 가운데 마디를 누른다.
②작양지진언을 할 때는 왼손으로 계인을 맺는데 엄지로 무명지 아래 마디를 누르는 상태로 주먹을 쥔다.
③언을 할 때는 역시 왼손으로 계인을 맺는데 작양지진언 시 주먹을 쥔 상태에서 장지무명지 약지의 세 손가락을 펴면 된다.
④세수면진언을 할 때는 왼손으로 계인을 맺는데 작양지진언 시와 같이 하면 된다.
해설
관욕소에 보면 삼업을 맑히는 데는 깨달음을 넘는 것이 없고, 물건을 깨끗이 하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다. 삼업을 완전히 맑힌 분은 바로 부처님이다. 즉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것은 진리의 세계를 여실하게 깨닫는 데에 있다. 그래야만 망심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망령된 행동을 일으키지 않아 번뇌도 없고 욕심도 없고 업보도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망심이 없으면 죄라는 것도 없게 마련이다. 인례향욕소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므로 부연치 않는다. 이렇게 올바로 깨달으면 만 겁의 청정함을 얻게 된다.
그런데 영가는 죄보로 형성된 더러운 몸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정결하게 하는 데 최고인 물에 향을 풀어 만든 향내나는 물로 목욕을 시키는 것이다. 향탕수 목욕으로써 영가의 몸에 있는 더러움과 냄새를 없애고 향내나는 몸으로 부처님 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영가를 여덟 가지 진언을 통해 목욕시키는 의식으로 관욕 순서에 나오는 진언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목욕진언을 통해 몸을 닦고, 작양지진언을 통해 이를 닦고 양치하고, 수구진언을 통해 입을 행구고, 세수면진언을 통해 손과 얼굴을 씻도록 한다.
제목이 ‘가지조욕’이라 하여 ‘가지로써 목욕시킴’이듯이 반드시 삼밀가지가 이루어지도록 해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진행하는 동안 해당하는 진언을 외울 때 영가가 진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정확하게 관해야 한다.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면서 딴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면 안될 것이다.
원문
<{가지화의}加持化衣>
{제불자}諸佛子 {관욕기주}灌浴旣周 {신심구정}身心俱淨 {금}今 {이여래}以如來 {무상비밀지언}無上秘密之言 {가지명의}加持冥衣 {원차일의}願此一衣 {위다의}爲多衣 {이다의}以多衣 {위무진지의}爲無盡之衣 {영칭신형}令稱身刑 {부장부단}不長不短 {불착불관}不窄不寬 {승전소복지의}勝前所服之衣 {변성해탈지복}變成解脫之服 {고오불여래}故吾佛如來 {유화의재다라니}有化衣財多羅尼 {근당선념}謹當宣念
{화의재진언}化衣財眞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바자나 비로기제 사바하」
{제불자}諸佛子 {지주기주}持呪旣周 {화의이변}化衣已遍 {무의자}無衣者 {여의부체}與衣覆體 {유의자}有衣者 {기고환신}棄古換新 {장예정단}將詣淨壇 {선정복식}先整服飾
{수의진언}授衣眞言 「옴 바리마라 바바아리니 훔」
{착의진언}着衣眞言 「옴 바아라 바사세 사바하」
{정의진언}整衣眞言 「옴 삼만다 바다라나 바다메 훔 박」
<{출욕참성}出浴參聖>
{제불자}諸佛子 {기주복식}旣周服飾 {가예단장}可詣壇場 {예삼**자존}禮三寶之慈尊 {청일승지묘법}聽一乘之妙法
{청리향욕}請離香浴 {당부정단}當赴淨壇 {합장전심}合掌專心 {서보전진}徐步前進
{지단진언}指壇眞言 「옴 예이혜 베로자나야 사바하」
역문
가지로써 옷을 입힘
모든 불자(망 엄부 남양 홍씨 길동 영가)시여, 관욕으로 이미 두루 몸과 마음이 함께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여래의 위없는 비밀스런 말씀으로 가지하여 저승옷을 준비합니다. 원컨대 이 한벌의 옷은 여러 벌이 되고 여러 벌의 옷은 곧 다함없는 옷이 됩니다. 몸의 형체가 길거나 짧거나 크거나 작거나 꼭 맞아 전에 입었던 옷보다 훨씬 좋은 옷입니다. 변화시켜 해탈의 옷을 만들고자 (하는 까닭으로) 우리 부처님의 화의재다라니를 삼가 마땅히 베푸오니 생각을 오로지 하소서.
옷으로 변화시키는 참말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바자나 비로기제 사바하」
(화의 소)
모든 불자(영가)시여, 가지로써 주문이 두루하여 (종이가) 이미 옷이 되었습니다. 옷 없는 이는 옷을 드리오니 알몸을 가리시고, 옷 있는 이는 헌 옷을 버리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으소서. 장차 정결한 불단에 나가려면 먼저 복식을 정돈하여야 합니다.
저승 옷을 주는 참말씀
「옴 바리마라 바바아리니 훔」
저승 옷을 입는 참말씀
「옴 바아라 바사세 사바하」
입은 옷을 정돈하는 참말씀
「옴 삼만다 바다라나 바다메 훔 박」
욕실을 나와 성인-부처님을 배알함
모든 불자(영가)시여, 이미 복식이 두루하였으니 이제 단장(부처님을 모신 단이나 장소)으로 나아가 자비하신 삼보님께 예를 올리고, 일승의 묘한 법을 들으십시오. 향기로운 욕실을 나와 마땅히 정결한 불단 앞으로 나가는 데 마음 모아 합장하고 찬찬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소서.
불단을 가리키는 참말씀
「옴 예이혜 베로자나야 사바하」
진행
관욕을 할 때도 마찬가지만 가지화의가 진행되는 동안 삼밀가지가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관욕 시에는 법주와 바라지, 그 외에 각종 진언을 외울 때에 수인을 맺을 증명법사가 필요한데, 부득이한 경우에는 법주와 바라지 둘 이상이 진행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혼자서 진행을 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①화의재진언을 할 때는 금강저를 쓰든지 없으면 합장을 하면 된다. 화의재진언의 뒤의 화의소는 법주가 요령을 3번 울리고 나서 혼자서 낭독하면 된다. 이때 바라지는 관욕방 안으로 들어가서 지의(紙衣)에 불을 붙여서 깨끗하게 태워야 한다.
②수의진언을 할 때는 오른손으로 계인을 맺는데 엄지로 무명지 가운데 마디를 누르는 모양이다. 왼손으로는 물을 찍어서 관욕방을 향하여 뿌려주어야 한다.
③착의진언을 할 때는 양손 엄지로 네 손가락 끝을 누르는 형태로 주먹을 쥐면 된다.
④정의진언을 할 때는 착의진언과 같이 하면 된다.
⑤출욕참성은 법주가 요령을 세 번 흔들고 나서 ‘출욕참성’ 제목을 그대로 외우고 출욕참성소를 혼자서 낭독하면 된다. 바라지는 관욕방에서 위패를 모시고 나와 재자(상주)에게 인계를 해야 한다.
⑥지단진언을 할 때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쥔 상태에서 둘째 손가락을 펴고 불단을 가리키면 된다. 이때 지단진언을 마쳤으면 법성게를 외우면서 부처님께서 계신 단으로 천천히 나간다. 법주, 바라지, 위패를 든 상주, 그 뒤에 재에 참석한 제자들 순으로 죽 열을 지어 불단 앞에까지 나가면 된다.
출욕참성편을 진행할 때 바라지는 관욕방에 있던 위패를 모시고 나와서 지단진언을 할 때에 부처님을 향하여 서게 하고 상주와 모든 재자들은 같이 합장하고 선다.
해설
종이로 만든 옷을 불에 사러 영가의 저승옷을 만들어 입히는 의식이다. ‘가지화의’는 지의를 태우면서 진언을 외우고 계인을 짓는 등 삼밀가지를 통해서 영가옷을 마련하여 영가가 해탈 열반의 세계로 입고 갈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이다. 이미 앞에서 관욕을 진행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바 있으므로 그 깨끗한 몸에 다시 부처님의 진언을 통해 만든 저승 옷-해탈의 깨끗한 옷을 입혀드리는 것이다. 관욕을 진행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욕방 안에 미리 기와장과 지의(紙衣) 두 벌을 마련하여 놓았을 것이므로 화의재진언을 외울 때 태워서 저승옷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속세의 더러운 옷을 입고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지화의로써 만들어진 저승옷을 입어야 한다.
옷은 없는 이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다. 화의 소에 이르기를, 옷이 없는 이는 알몸을 가리고 옷이 있는 자는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말한다. 정결한 불단에 나가려면 복식을 먼저 정돈해야 된다는 것이다. 겉의 모양이나 형식을 갖추는 것은 일견 보면 필요 없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관욕을 통해서 깨끗해진 몸과 마음에 다시 가지화의를 통해서 부처님의 법력으로 만들어진 저승옷을 입는다. 이미 옷이 있는 자라도 옛날에 입던 헌 옷을 버리고 새로 만들어진 옷을 입는다. 여기에서 입는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옷을 입는다는 모양새만 옷일 뿐 실상은 옷이 아니라 일종의 깨달음에 의한 법의 옷을 입는 것이다.
과거에 입던 헌 옷은 시기, 질투, 탐욕, 번뇌, 악담, 이간질, 남을 속임, 거짓말, 살생, 도둑질, 사음, 망령된 말 따위고, 새로 입는 옷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염불의 육바라밀 옷이다.
『법화경』 법사품에서는 법사가 되려는 자는 여래의 방, 여래의 자리에 여래의 옷을 입고 앉아서 법을 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래의 옷이란 바로 자비, 인욕 등의 법을 옷이라 표현하고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저승옷이라는 것도 실상은 법(진리)을 옷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다음에 진행하는 여러 진언들은 강제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오직 영가를 구제하여 왕생시키려는 자비심에서 저승옷을 만들어 수의진언을 통하여 영가에게 주고, 착의진언을 통하여 입게 하고, 정의진언을 통하여 옷 매무새를 정돈하게 한다. 그리고도 행여 다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다시 옷을 정돈하였으니 부처님의 앞에 나아가 자비하신 삼보님께 예배드리고 오직 한 길의 깨달음을 말하는 일승의 묘한 법을 들으라고 주문한다. 그리고나서 다시 불단을 가리키는 지단진언을 외워서 불단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혼자서는 업력만을 따라가고, 스스로 의지를 발동하여 선도로 갈 수 없는 상태의 영가, 즉 중음신에게 자비로운 의식을 통해서 정토로 인도하는 것이다.
원문
{법신변만백억계}法身遍滿百億界 {보방금색조인천}普放金色照人天
{응물현형담저월}應物現形潭底月 {체원정좌보련대}體圓正坐寶蓮臺
{나무대성인로왕보살}南無大聖引路王菩薩 (3번)
({정중게}庭中偈)-{정중}庭中
(일보증부동}一步曾不動 {내향수운간}來向水雲間 {기도아련야}旣到阿練若 {입실예금선}入室禮金仙
({개문게}開門偈)-{개문}開門
{권박봉미륵}捲箔逢彌勒 {개문견석가}開門見釋迦 {삼삼례무상}三三禮無上 {유희법왕가}遊戱法王家
<{가지예성}加持禮聖>
{상래}上來 {위명도유정}爲冥道有情 {인입정단이경}引入淨壇已竟 {금당례봉삼보}今當禮奉三寶 {부}夫 {삼보자}三寶者 {삼신정각}三身正覺 {오교영문}五敎靈文 {삼현십성지존}三賢十聖之尊 {사과이승지중}四果二乘之衆 {여등}汝等 {기래법회}旣來法會 {득부향연}得赴香筵 {상삼**난봉}想三寶之難逢 {경일심이신례}傾一心而信禮 {하유보례지게}下有普禮之偈 {대중수언후화}大衆隨言後和
<{보례삼보}普禮三寶>
{보례시방상주}普禮十方常住 {법신보신화신}法身報身化身 {제불타}諸佛陀 (1배)
{보례시방상주}普禮十方常住 {경장율장논장}經藏律藏論藏 {제달마}諸達摩 (1배)
{보례시방상주}普禮十方常住 {보살연각성문}菩薩緣覺聲聞 {제승가}諸僧伽 (1배)
({의상조사 법성게}義湘祖師 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H7869>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제불대원경}諸佛大圓鏡 {필경무내외}畢竟無內外 {야양금일회}爺孃今日會 {미목정상시}眉目正相시
<{수위안좌}受位安座>
{제불자}諸佛子 {상래}上來 {승불섭수}承佛攝受 {장법가지}仗法加持 {기무수계이임연}旣無囚繫以臨筵 {원획소요이취좌}願獲消遙而就座 {하유안좌지게}下有安座之偈 {대중수언후화}大衆隨言後和
{아금의교설화연}我今依敎設華筵 {종종진수열좌전}種種珍羞列座前
{대소의위차례좌}大小依位次第坐 {전심제청연금언}專心諦聽演金言
{수위안좌진언}受位安座眞言 「옴 마니 군다리 훔 훔 사바하」
{백초임중일미신}百草林中一味新 {조주상권기천인}趙州常勸幾千人 {팽장석정강심수}烹將石鼎江心水
{원사망령헐고륜}願使亡靈歇苦輪 {원사고혼헐고륜}願使孤魂歇苦輪 {원사제령헐고륜}願使諸靈歇苦輪
역문
법신은 백억의 세계에 두루하여
금빛 광명 널리 펴서 하늘 땅을 비추시네
중생의 근기따라 나타나심 물 속의 달과 같지만
본체는 원만하여 보배로 된 연화좌에 앉으셨네
대성인로왕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법당 마당에 드는 게송)
일찍이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물과 구름사이를 지나쳐 오셨습니다
이미 아련야(적정처, 절)에 도달하셨으니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소서
(법당 문을 여는 게송)
발을 걷으면 미륵 부처님을 만나게 되고
문을 열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뵙게 됩니다
위 없는 부처님께 아홉 번 예배하고서
법왕의 집안에 머물면서 노닐고 즐겨 보세
가지로써 성인께 예배함
위로부터 명도의 유정들이시여, 인도함을 받아 이미 청정한 법당에 들어오셨으니, 이제 마땅히 위 없는 부처님을 받들어 예배하소서.
삼보란 법신보신화신의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오시(五時-평생동안)로 가르치신 신령스런 법문(경율론 삼장)과 십주십행십회향위의 삼현, 십지위의 보살과 네 가지 과위를 얻은 성문, 연각의 승가를 말합니다.
영가시여, 당신들은 이미 법회에 오셔서 향기로운 법석에 나감을 얻었으니 삼보는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일심을 기울여 신심있게 예배하소서. 아래 절하는 게송이 있으니, 대중은 말을 따라 합창하소서.
(널리 삼보님께 예배함)
널리 시방에 항상 계신 법신 보신 화신의 모든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널리 시방에 항상 계신 경장 율장 논장의 모든 가르침에
예배합니다.
널리 시방에 항상 계신 보살 연각 성문의 모든 스님네께
예배합니다.
(의상조사 법성게)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양이 본래 없고
모든 법이 동함 없어 본래부터 고요해라
이름 모양 모두 없어 온갖 것이 끊겼으니
깨달아야 알 수 있고 달리 알 수 없는 경계
참된 성품 심히 깊고 지극히 미묘하여
자성만을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루리니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한티끌 속 그 가운데 온 우주를 머금었고
온 우주의 티끌 속에 낱낱함이 그와 같네
한이 없이 아득한 무량겁이 일념이요
한 생각 짧은 시간 한이 없는 겁이어라
구세도 십세도 함께 서로 하나 되어
얽혀 잡란한듯 하나 따로따로 이루었네
처음 발심 하던 때가 깨달음을 이룬 때요
생사 열반 두 경계가 서로 같은 바탕일세
이와 사가 아득하여 분별할 길 없는 것이
열 분 부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니라
해인삼매 그 속에다 온갖 것을 갈무리고
불가사의 공덕장엄 마음대로 드러내니
감로비로 허공 가득 일체중생 이익주네
중생들의 그릇따라 온갖 이익 얻게 되니
수행자여 돌아가게 진리의 고향으로
망상을 쉬지 않고 얻을 것이 바이 없네
인연 없는 방편 지어 마음대로 잡아쓰니
고향집에 돌아가서 그릇따라 양식 얻어
다라니의 무진 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온법계를 장엄하여 극락보전 이루우고
다함 없는 참된 법의 중도상에 편히 앉아
영겁토록 동함없는 그이름이 부처라네
(자리를 받아 편안하게 앉음)
모든 불자(영가)시여, 위로부터 부처님의 섭수하심을 받아 법의 가지로써 이미 죄의 얽매임을 떠나 법연에 이르렀으니 열반의 세계에서 노닐려고 한다면 자리에 나가소서.
아래 편히 앉는 게송이 있으니, 대중은 따라 합창하소서.
(편안하게 앉는 게송)
내가 지금 가르침에 따라 장엄한 (법의) 자리를 마련하여
갖가지 진기한 음식을 영가들의 자리 앞에 진설하오니
어른 아이 위계따라 차례대로 앉으셔서
오로지 한 맘으로 부처님 말씀 자세히 들으소서
위계를 따라 편안하게 앉는 참말씀
「옴 마니 군다리 훔 훔 사바하」
백 가지 초목 중 새로운 한 맛을
조주스님은 몇 천 번이나 권했던가
돌솥에 강심수 고이 달였사오니
망령이여, 드시고서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고혼이여, 드시고서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모든 영가여, 드시고서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진행
관욕을 마치고 나면 지단진언을 할 때 상주가 위패를 모신 상태에서 부처님 앞에 나아가 부처님을 향하여 나란히 함께 일어서서 삼보께 예배를 하는 순서를 갖는다. 목탁과 요령을 맞춰서 함께 절하면 된다.
본래 49재의 관욕과 대령은 큰재를 지낼 경우 법당의 바깥에서 마치고 나서 법당으로 영가를 인도하여 들어가는 형태를 취하게 되므로 법당의 뜰에 서서 하는 ‘정중게’, 법당의 문을 여는 ‘개문게’를 하고 법당을 들어가서 영가가 부처님의 앞에 서서 삼보님께 예배를 올리는 예식(가지예성)을 진행하는 것이다.
법당 내에서 대령·관욕을 진행할 경우는 정중게와 개문게는 생략하고, 법신변만백억계를 법주와 바라지가 함께 합창하고 난 다음 나무대성인로왕을 부른 이후에 곧바로 법주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가지예성소를 낭독한다. 그리고 ‘보례삼보’라고 선창을 하면서 다함께 인례의 목탁에 맞춰 ‘보례시방상주~’를 외우면서 선 채로 삼배를 올리면 된다.
위패를 모신 상주와 대중 모두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3번 절을 한다. 이때 위패를 모신 상주는 무릎을 구부리고 위패를 내려 부처님께 절한다.
부처님께 참배를 마친 다음 법성게를 외우면서 법주, 바라지, 위패, 상주, 참석 재자 순으로 법당을 세 바퀴 돌아 영가의 위패를 영단에 안치한다.
법주 요령을 세 번 울리고 안좌소를 낭독하고 나면, 안좌게를 합창하고 법주가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수위안좌진언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 바라지가 다게를 한다. 다게의 ‘원사망령헐고륜 원사고혼헐고륜 원사제령헐고륜’을 합창으로 진행하고 나면 관욕의 모든 순서를 마치게 된다.
해설
이상과 같은 의식을 통하여 대령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관욕으로 깨끗하게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으므로 업보가 많은 중생이 부처님을 뵙기 위하여 법당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절차를 마친 것이다.
본래 법성 차원의 진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더럽고 깨끗함, 죄와 선 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법성 차원의 진리에 입각한 삶을 살지 못하고 진리계를 배반하고 아집에 의해 구성된 삶을 살아오고 있다. 자신이 지은 업을 따라 더럽고 깨끗함이 달라지고, 죄를 가진 자와 선으로 상을 받을 자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게송에서 이르기를, 법신의 몸이 백억의 세계를 두루하여 금빛 광명을 널리 펴서 하늘과 땅을 비추시는데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물속의 달 그림자와 같이 나타나지만 본체는 연화좌에 바로 앉아 계신다고 하였다.
모든 절에는 갖가지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의 자비의 원력에 의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하게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중생들이 있는 곳마다 나타나신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달이 하나로 존재하지만 각기 물이 있는 곳마다 모두 비치어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것과 같다. 중생들 각자가 보고 있는 부처님의 형상은 모두가 같은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고, 중생들의 마음에 비추어진 달인 것이다.
마음에 슬픈 생각을 가진 사람은, 똑같은 불상을 보고서도 부처님이 우시는 것 같아 보여 슬퍼하신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부처님이 기쁘게 웃으시는 것처럼 보여 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등상으로 모셔진 부처님이 울고 웃는다는 것은 중생들의 생각일 뿐이지 진실로 그런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금방 웃었다, 우는 존재도 아니시다. 다만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형상을 달리하여 강물에 달 그림자가 비치듯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런데 달의 모양은 찌그러진 물에서는 찌그러져 보이고, 더러운 물에서는 더러워 보인다. 하지만 달 자체가 찌그러졌거나 더러워진 것이 아니듯이 완전하지 않은 형상으로 나타난 부처님의 본래 모습은 언제나 법신(진리) 자체로서 진여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가로 하여금 중생의 몸을 버리고 진여 법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성인로왕보살님께 귀의하여 인도를 받아 부처님을 배알하기 위하여 따라 나서는 것이다.
정중게에서 아련야는 사찰을 가리킨다. 본래 아련야는 안정처라고 하여 고요하게 앉아서 다른 잡된 것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찰이 고요한 곳에 있게 되므로 아련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물과 구름 사이를 지나쳐 왔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생 차원의 말이 아니고 법성 차원의 말이다. 왔다거나 간다는 말은 무명에 의해 아집을 일으키고 진여 법계를 배반하고 난 다음의 차원에서 오는 중생계의 잘못된 생각일 뿐, 진실적인 입장에서는 오고 감이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부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거나 하는 것은 삿된 생각이니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늘 외우는 『반야심경』에서도 더럽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하여튼 부처님 도량에 들어 왔으니 그런 진여법계를 관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개문게는 문자 그대로 법당문을 여는 게송이다. 발이란 방문 앞에 쳐 놓는 여름철에 사용하는 피서 용구이다. 안과 밖의 빛의 농도 차이에 의해서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권박봉미륵 개문견석가’는 문자대로 새기면 미륵 부처님은 밖에 계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안에 계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재에 나투신 부처님이요, 미륵부처님은 미래에 나투실 부처님이기 때문에 발을 걷으면 미륵 부처님을 만나게 되고, 문을 열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삼삼례라는 것은 아홉 번 예를 올린다는 말이다. 이것은 부처님 재세시에, 부처님께 귀의하는 의식으로서 삼귀의를 세 번 하였다고 한다. 삼귀의 한 번 할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하게 되므로 삼례를 하면 아홉 번 절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다른 성인들과 달리 자신을 특별하다고 내세우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귀의한다든지 예배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존경과 예배가 자신에게만 행해지지 않고 부처님 자신과 자신을 있게 한 진리, 그리고 자신이 알아낸 법을 가르쳐서 자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한 제자들을 모두 묶어 세 가지 보배 속에 넣고 삼귀의를 통하여 전체 교단에 행해지도록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불법이 세간에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는 염원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초기 교단에서는 별다른 출가의식을 행하지 않고 삼귀의를 세 번 하는 것으로 출가의식을 행하였다. 삼귀의를 통해서 삼보 대중에 참례하게 되고, 삼보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 후에 올바로 법을 관하고, 진리를 관한 법에 의해서 법계에 머물 수 있어야만 법왕의 집안에서 제대로 노닐 수가 있는 것이다.
영가로 하여금 이와 같은 모든 절차를 거쳐 법당에 들어왔으니 삼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삼보를 만나기 어려움을 일러주어, 진실로 부처님께 예배하도록 해야 한다.
‘조상을 올바로 천도하려는 자는 자신의 복력이나 재수를 바라고 조상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삼악도를 헤매는 조상님을 불*하게 생각하여 꼭 극락에 가시도록 간절하게 참회하고 기도해야 한다. 조상님이 재자와 함께 부처님에게 절하고 기도하도록 해야 올바른 천도가 된다’는 것은 가끔 저승에 올바로 못가고 후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조상이 있으니 천도를 해야겠다고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나무에 열매가 제대로 맺으려면 뿌리가 튼튼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영양분을 잘 **들여 나무가 잘 자라고 가지가 무성해지고 열매도 잘 열리게 된다. 가족이라는 것은 공업(共業)이라는 양분을 먹고 사는 나무이다. 조상은 뿌리같은 존재이고, 나는 줄기같은 존재이며, 자손들은 과실같은 존재이다. 뿌리가 부실하면 줄기가 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록 줄기가 성하여 지엽에 과실을 맺더라도 좋은 결실을 얻기 어렵다.
만약 조부가 나쁜 일을 행하여 얻은 재물로 집안 살림을 꾸려왔다면 온 가족들이 공범이 되는 것이고, 그 조부는 죽은 뒤 자신의 업보 때문에 지옥아귀축생 등의 삼악도에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조부는 오직 자신 혼자만을 위해서 나쁜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집안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물론 자신 혼자만을 위하여 한 경우도 있겠지만, 조부가 만약 **서 삼악도에 가 있다면 그 가족의 나무는 뿌리가 썩고 있는 것이다.
썩고 있는 뿌리를 치료하지 않으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결국에는 말라 죽게 된다. 아들을 얻으려고 기를 쓰고 별 짓을 다해도 절손이 되는 집안, 하는 일마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집안, 가족들이 화평하지 않은 집안에는 분명히 이런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삼악도에 떨어진 조상을 구제하지 않으면 공업에 의해 구성된 집안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조상이 가족과 집안을 위하여 지은 악업 때문에 삼악도에서 고생한다면, 그 혜택을 누리고 사는 가족과 후손은 그 조상의 죄를 대신 참회하고 복덕을 지어야만 한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답답하면 점치는 집에 가서 문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가 피흘리고 죽은 조상이나 배고프거나 헤매고 다니는 누가 있어서 재수가 없다는 점괘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재수 좋으라고 굿을 하거나 절에 가서 천도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천도재는 말하자면 ‘나 재수좋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생각으로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재를 올린다 하더라도 조상님에게 통하지 못하므로 천도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재자 자신도 진정으로 삼보님께 귀의하는 절을 해야 하며, 영가도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참된 진리를 깨달아 극락왕생하게 해야 한다.
여기에서 오시(五時)란 부처님의 성도 이후 열반하실 때까지 49년 동안 설하신 법을 말한다. 중국 천태종의 지자 지의대사에 의해 처음으로 오시란 말이 등장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다섯 시기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는 화엄시로서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이루어 삼칠일(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셨다는 것이요, 둘째는 아함시로서 처음에 화엄경을 설하였으나 오직 대보살들만 알아 듣고, 중생들이 알지 못하고 전부 퇴장하고 말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대로 열반에 들려하시다가 범천왕의 권청에 의하여 마음을 바꾸어 기초부터 설하셨다는 아함경으로 12년 동안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셋째는 방등시로서 8년 동안 유마경 등 방등경전을 설하셨다는 것이요, 넷째는 반**로서 22년 동안 대부정을 통하여 반야 공의 세계를 설하셨다는 것이요, 다섯째는 반야열반시로서 6년 동안 당신이 이 세상에 나오신 뜻을 다시 밝히셨다고 하는 법화경과 열반하시기 전에 설법하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시를 평생 동안이라고 새긴 것이다.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려움은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아는 내용일 것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맹구우목’이라. 깊은 바다 속에 눈 먼 거북이가 사는데 천 년에 한 번씩 나와서 숨을 쉰다고 한다. 바다 위에 올라와서 편안하게 숨을 쉬려면 구멍 뚫린 나무토막을 만나야 한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처님을 만나뵙는 일이 이와 같이 드물고 어렵다.
이렇게 낮은 확률을 가진 일이 가지예성을 행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영가가 알고 진정한 예배를 올리도록 하라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과 항상 그대로인 진리와 그 진리를 알아 실천하는 삼보님께 예배를 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하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섭수하시게 된다. 즉 법당 주인의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인의 환영을 받아야만 편안하게 앉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수가 있다. 삼보께 환영을 받아서 자리에 순서대로 편안하게 앉아 공양을 하고 법문을 듣고서 윤회를 벗어나라고 간곡하게 권하는 것이다.
다게는 ‘조주 청다’라고 하여 조주 고불이라고 불리우는 중국의 아주 유명한 선승에 얽힌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조주스님은 80세에 도를 깨닫고 나서 100살까지 20년 동안 자신이 깨달음을 점검하는 보림 기간을 갖고 100살부터 120살까지 교화를 하여 고불(古佛)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이 스님은 누구든지 와서 법을 물으면 ‘차나 한 잔 드시게’ 하며 차를 권하였다고 한다. 오늘 영가에게도 이 조주스님이 권하였던 차를 권하여 이 차를 마시고 영가가 윤회에서 벗어나 법계에 들기를 권하는 것이다.
다게의 ‘원사망령헐고륜 원사고혼헐고륜 원사제령헐고륜’하고 나면 관욕을 마치게 된다. 이어서 신중단을 향하여 신중작법을 진행하고, 상단불공을 하는데 주불이 부처님일 경우는 삼보통청, 지장보살님일 경우는 지장청을 진행한다. 그후 영가를 위하여 관음시식을 진행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은 박정무 **요 **.